예술에 대하여

게하르트 리히터: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문 거장, 그는 왜 끊임없이 변주하는가?

deepbluetime 2025. 3. 6. 20:18

게하르트 리히터: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문 거장, 그는 왜 끊임없이 변주하는가?

 

 

(Gerhard Richter, 1932-)
(Gerhard Richter, 1932-)

 

 

게하르트 리히터는 누구인가? 그의 삶과 예술 세계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동독 체제 속에서 성장했다. 젊은 시절 그는 동독의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배웠으나, 체제의 엄격한 예술적 통제에 한계를 느꼈다. 결국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서독으로 탈출해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다시 미술을 공부하며 전혀 새로운 예술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리히터는 특정한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다. 그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과 그것을 해체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표현하는 방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해 왔다. 그의 작업 방식은 때로는 사진처럼 정밀하면서도, 회화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그는 '사진 회화(Photo Painting)'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했으며, 이후에는 완전히 추상적인 표현으로도 전환하며 자신의 예술을 확장시켜 갔다.

흐릿한 이미지, 그는 왜 선명함을 거부했을까?

리히터의 대표적인 기법 중 하나는 ‘블러(Blur)’ 효과다. 그는 브러시나 페인트 나이프로 표면을 문질러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런 방식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기억’과 ‘시각적 경험’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현실을 그대로 본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의 기억과 감각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리히터는 이러한 ‘불완전한 시각’을 작품을 통해 탐구하고, 보는 이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해석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기법이 돋보이는 대표작 '베티(Betty)' (1988)는 사진처럼 보이지만, 회화적 터치로 인해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델이 된 그의 딸은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으며, 관객은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상상해야 한다. 리히터는 이렇게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현실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베티(Betty)' (1988)
'베티(Betty)'  (1988)

 

사진인가 회화인가? 리히터가 창조한 새로운 시각 언어

리히터의 초기 작품 중 많은 부분은 사진을 기반으로 한 ‘사진 회화’였다. 그는 신문이나 잡지 속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긴 후, 표면을 흐릿하게 만들어 마치 기억 속 장면처럼 보이게 했다. 대표작 '캔들(Candle)' (1982)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는 촛불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명한 사진이 아니라, 미묘한 터치로 인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이처럼 빛과 어둠, 선명함과 흐릿함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감각을 극대화했다.

또한 '리딩(Reading)' (1994)은 그의 딸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흐릿한 색감과 부드러운 붓 터치가 조화를 이루며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단순한 독서의 순간을 초월적이고 사색적인 경험으로 변화시키며, ‘우리는 무엇을 읽고, 어떻게 기억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추상과 감각: 그는 왜 회화를 해체했을까?

리히터는 이후 사진을 기반으로 한 회화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색채와 질감을 강조한 대형 추상화를 선보였다. 그는 페인트를 캔버스 위에 올려놓고 긁어내거나 흩뿌리는 방식으로, 의도적이면서도 우연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기법은 대표작 '추상화 1024-3(Abstract Painting 1024-3)' (1984)에서 잘 드러난다. 겹겹이 쌓인 색과 형상은 무작위로 배열된 듯하지만, 그 안에는 절묘한 균형과 리듬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색과 형태를 통한 감각적 경험의 확장이었다.

그는 한 가지 방식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험을 지속했다. 그는 ‘예술이란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고 말하며, 관객이 직접 해석하고 의미를 찾도록 유도했다.

성모 수태고지(Annunciation after Tizian, 1973): 과거와 현대를 잇는 실험

게하르트 리히터의 '성모 수태고지(Annunciation after Tizian)' (1973)은 16세기 르네상스 거장 티치아노(Titian)의 작품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리히터는 고전적인 성화의 형식을 가져와 자신의 독창적인 흐릿한 터치와 사진 회화 기법을 적용했다. 원작의 성스러운 분위기는 그의 특유의 블러(Blur) 효과를 통해 마치 기억의 한 조각처럼 변화했으며, 이는 신성한 이미지와 현대적 회화 기법이 충돌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미술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새로운 해석을 덧입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리히터는 이 작품을 통해 사진과 회화뿐만 아니라, 고전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는 원작의 뚜렷한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고, 색과 빛을 조절하여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러한 방식은 그가 작품에서 일관되게 탐구해 온 주제인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Annunciation after Tizian, 1973)
(Annunciation after Tizian, 1973)

리히터의 예술이 현대 미술에 남긴 것

게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단순한 미학적 실험을 넘어, 현대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그는 회화가 여전히 강력한 표현 수단임을 증명했으며,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며 현대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작품은 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광고, 영상 예술에도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에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보는 것’이 단순한 시각적 경험이 아니라, 기억, 해석, 감정이 결합된 복합적인 행위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리히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딥블루의 예술적 시선
리히터의 작품들 속에 담긴 것들은 흐린 경계속에서도 그 형태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 모호한 선명함 덕분에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화자도 역시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통해 많은 영감을 받게 되었다. 무엇이 본질일까? 내가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상상하는 것일까, 혹은 그 모호한 경계 너머에 있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 모호한 경계 속에 놓이게 될 때 내 세상은 끝도 없는 공간이 펼쳐지는 듯하다.